[여유50+] 느리게 듣기

Real 라이프 2014.07.11 16:39

느리게 듣기

그것은 언제나 곁에 있었다. 단지 잊고 지냈을 뿐. 마음을 열고
이름을 부르는 순간, 모든 건 지금 여기에서 살아 숨 쉰다.

 

다시 LP를 꺼내며

CD에 밀려 끝난 줄로만 알았던 LP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거래가 많아지고, LP로 음악을 틀어주는 술집도 점점 늘어난다. 음악을 듣는다는 순수한 기쁨이 어느새 다시 돌아오고 있는 걸까?

Writer 장우철(<GQ 코리아> 피처 디렉터)
Photographer 조성재

어릴 때, 양옥에 사는 부잣집 친구네 집에 놀러 갈 때면 공연히 긴장이 되곤 했다. 도무지 우리 집에는 없는 것들이 거기엔 다 있는 것 같았으니까. 안방, 건넌방, 부엌, 뒷간이 아니라 응접실에 주방에 욕실에 다용도실에, 현관을 열면 으레 있는 신발장마저도 온통 낯설고 신기해 보였다. 그중에서도 전축이라는 물건이 갖는 힘은 실로 대단했다. 응접실 한쪽에 그야말로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풍모는 웬만한 기와집 대들보보다 든든해 보였다. 어떻게 작동시키는 건지는 나도 친구도 몰랐다. 만지면 ‘아버지께 혼나는’ 물건이라는 것만 알았다. 그러다 슬슬 ‘오디오’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할 무렵이 되자, 전축은 여느 집에서도 조금은 만만한 가전제품이 되었다. ‘팝송’에 눈을 뜬 고등학생이 있는 집이라면 더더욱.

이쯤에서 서로의 기억을 들춰보자. 당신이 태어나 처음 산 음반은 무엇인가?
스스로의 취향으로 골라서 돈을 주고 구입한 첫 번째 음반 말이다. 그건 곧 ‘내 인생의 첫 번째 음악’과 같은 말이 아닐는지. 가령, 레이프 가렛, E.L.O, 비틀스나 레드 제플린 혹은 김추자거나 양희은일 수도, 그렇게도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머릿속으로 그린 그림은 한결같을 것이다. 둥글고 넓적한 검은 판. 가는 선들이 뱅글뱅글 돌아가며 우툴두툴 새겨진, 가운데엔 구멍이 뻥 뚫린, 빛을 받으면 날씬하게 빛나던 얇은 판. 바로 LP다.
행여 지문이라도 묻힐세라, 먼지라도 올라앉을세라,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잡던 감촉 그리고 특유의 냄새. 그건 곧 음악의 감촉이었고, 음악의 냄새였다.

그러다 CD가 나타난 건 1980년대 후반이었다. CD의 다부지게 작으면서 반짝이는 생김새는 마치 우주나 미래에서 곧장 떨어진 뭔가로 보였다. 그리고 CD는 시장에서 곧장 LP를 몰아냈다. 1990년대 중반부터 LP는 고물상이나 박물관으로 보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소수의 마니아들은 여전히 그 세계를 애호했지만) 국내에 남아 있던 마지막 LP공장이 2004년 문을 닫으면서, 이 땅에서 LP는 아예 끝나버린 듯했다.

그런데 2011년 11월, 서울에서 생소한 이름의 행사가 열렸다. ‘서울 레코드 페어’라는 이름의 행사였다. 레코드 관련 업체는 물론, 소규모 음반점이나 일반인까지 저마다 부스를 마련해 레코드를 사고파는 장이 선 것이다. 비단 거래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통기타’ 하면 바로 떠오르는 전설의 이름 이정선이 무대에 올라 특별 공연을 열기도 했다. 2000여 명의 관객이 그곳을 찾았고 비공식 집계지만 1억5000만원어치 정도의 앨범들이 거래되었다. 목격한바, 그 자리는 축제의 장이자 또한 ‘생사 확인’의 한마당 같았다. 당신도 여전히 이렇게 음악을 듣고 있었군요! 서로가 서로를 확인하며 덩달아 함께 신나는 장. 그 후 서울 레코드 페어는 해마다 방문객을 늘리며 계속되고 있다.

그럼 특별히 LP로 트는 음악이 CD나 MP3파일로 트는 음악보다 좀 더 음악다운 순수함을 느끼게 해주는 이유는 뭘까? 예민한 전문가의 귀가 아닌 다음에야, 듣자마자 음질의 차이를 확연히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먼지가 바늘에 닿을 때 나는 지글거리는 소리를 꼭 낭만적이라고 못 박을 필요도 없다. 다만 한 가지. 노래 한 곡 한 곡을 소중히 다뤄야만 한다는 점이 다르다. LP를 만지는 일은 으레 손길이 조심스럽기 마련이다. 그만큼의 정성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야 겨우 한 곡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다른 노래 한 곡을 들으려면, 다시 똑같이 음반을 찾고, 노래를 찾고, 바늘을 올리는 일을 처음부터 또 해야 한다. 그런 과정 자체가 바로 음악을 듣는 태도에까지 영향을 준다.

LP는 더 이상 ‘지나간’, ‘사라진’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늘 함께 있었던 것인데, 빛의 속도로 변하는 것 같은 사회 속에서 자칫 잃어버린 즐거움을 찾는 이정표라는 가치를 최근 더하게 된 물건이다. 말해 뭐할까, LP는 느리다. 그 느림 속에 음악의 가치가 새삼 살아난다.
노래를 만든 사람의 마음과 노래를 듣는 사람의 마음이 차분히 포개지는 경험을 북돋우는 힐링의 시간, 바로 LP의 시간이다.

 

_LP 바람이 불어오는 곳, LP 바와 LP 숍 남산 언덕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 용산 미군 부대가 있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경리단길은 서울에서 소위 ‘뜨는’ 지역이다. 경리단길 한갓진 골목에 ‘골목’이라는 술집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벽면을 가득 채운 LP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말이 쉽지, 두께로 치면 채 5mm가 되지 않는 음반을 차곡차곡 꽂아서 그런 풍경을 만든다는 건 여간한 취향과 정성과 인내심으론 안 되는 일, 무엇보다 진짜 좋아하며 즐기는 일이라야 가능하다. 그런데 그 풍경을 보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나고 각진 마음이 아니라 둥글고 부드러운 마음이다. 이 많은 음반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골라서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어느새 음악을 처음 듣는 것만 같은 순수함을 닮아간다. 여기 음악이 있고, 여기 내가 또한 있구나. 사람들은 혼자서 바에 앉든, 삼삼오오 모여 앉든,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긴다. 괜히 그렇게 보인다고 허풍을 떠는 게 아니라 보이는 모습이 과연 그렇다. 말하자면 거기에 있으면 ‘음악’이라는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는 것 같은 느슨한 평화가 샘솟는다.
LP 바 ‘골목’의 황세헌 대표는 말한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애써 찾아오는 집이라는 점이, 오가다 들르는 술집과는 다른 분위기를 만드는 것 같아요. 손님들이 들어오실 때부터 음악이라는 기대감이 있는 거죠.
모르겠어요. LP는 잠시 동안 유행될지도 모르지만 음악은 아니잖아요. 따로 오신 손님들이 합석하는 경우를 자주 봐요. 자신이 옛날에 좋아했던 음악 얘기, 영화 얘기, 그런 얘기들을 하는 걸 많이 보죠.”

 

한편 LP를 파는 가게들도 매출이 느는 추세다. 서울의 LP 가게는 청계천 주변과 회현 지하상가를 중심으로 여전히 이어진다. 최근에 더해진 흐름이라면, 인터넷에서 온라인으로 팔거나, 좀 더 젊은 마니아들이 찾는 음반점을 새로 내어 해외 음반을 직수입하는 가게가 생겼다는 것이다.
가요 음반을 사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들르는 사이트로 ‘LP25(www.lp25.com)’가 있다. 이런 앨범이 있었나 싶은 낯선 것부터 몇백만 원을 넘어가는 희귀반까지 딱히 구입하지
않더라도 이것저것 검색해보는 재미가 있다. 회현지하상가에 있는 ‘리빙사’는 그 역사를 박제로 만들지 않도록 만든, 여전히 새로운 음반들이 들고나는 서울에서 가장 활발한 LP 가게다. 리빙사의 이석현 대표는 한 TV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LP는 부활한 적이 없어요. 늘 있었으니까요.”

 

후회 없는 베스트 LP 6장
비틀스 <The Beatles Stereo Vinyl Box Set >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비틀스의 음반 14장이 들어 있는 박스 세트. 다만 해외에서 구입하면 300달러 정도인데, 국내에서는 70만원 정도이니 참조.

박인희 <모닥불> 흐르는 물에 금방 씻은 듯 청결한 박인희의 목소리. 어느 음반이라도 괜찮다.

유재하 <사랑하기 때문에>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부드러운 앨범. 최근 미공개 트랙을 포함해 새로운 LP로 발매되었다.

조용필 <Hello> 가왕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의 최근작, 역시 LP로 발매되었다.

산울림 <아니 벌써> 영원한 악동 산울림의 음반은 시리즈처럼 되어 있는 표지 때문에 한번 사면 자연스레 여러 장을 모으게 된다.

김추자 <신중현 작곡집 후회/석양> 최근 컴백을 알린 불세출의 여가수. 유명한 앨범이 많지만 이 앨범에서는 ‘하필 그 사람’과 ‘말도 하지 말아요’ 빠른 두 곡을 특별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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